Untitled Document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

    예부터 경상도 사람들은 서로 간에 끈끈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것이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친구나 이웃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만사 제쳐놓고 나서서 해결해주고, 주변에 힘든 사람이 있으면 아끼지 않고 퍼주는 사람이 있어 살만한 지역이었다. 이런 것을 정치하는 분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우리가 남이가.”하는 식으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본래 좋은 뜻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라디오 광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이자를 갚으러 온 친구에게 “친구 사이에 이자는 무슨. 네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지.”라고 되레 나무라는 말을 뭐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됐다.”라는 한 마디. 어떻게 보면 무뚝뚝하고 정나미 없이 말한다고도 할 수 있는 이 말 속에 사실은 경상도식 인정이 고스라니 들어 있다. 처음에 친구에게 돈을 빌러 온 그 사람은 얼마나 위축되었을까.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두 말 하지 않고 적지 않은 돈을 선뜻 내어준 친구가 고마워서, 어려운 사정에도 이자를 마련해서 찾아가 조금밖에 못 준다고 하려는데, 그걸 눈치 채고 친구가 “됐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었다.
    이렇듯 이웃이 사촌이 되고, 친구가 형제같이 살다보니 네 것 내 것이 없고, 나의 일과 네 일이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내가 조금 덕을 보는 수도 있고, 또 조금 손해를 보는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 반대로 될 수도 있어서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지는 법도 없었고, 급하면 남의 물건이라도 먼저 쓰고 나중에 말하고 돌려주는 것도 별 일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러한 미덕이 잘 못 나타나는 경우를 가끔 본다. 큰 것을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 모이는 곳에만 가보면 기초적인 질서가 실종된 것이 쉽게 보인다. 일껏 남들이 줄 서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지 않나, 지하철이나 버스 안과 같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목청껏 떠드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함께 쓰라고 마련해놓은 공공기물을 혼자서만 독점해서 남들이야 어떻게 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도 꽤 있다. 이런 것은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는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왜곡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어떤 이가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나와서 주차타워에 주차된 차를 관리인에게 내어달라고 했더니, 그런 번호가 없다는 것이다. 일행은 비를 맞고 기다리는데, 10여분 이상 온갖 차량을 다 점검해서 결국 차를 빼고 보니, 관리인이 입고할 때 차량번호를 잘 못 입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사무실 문을 홱 닫고 들어가 버리더라는 얘기를 듣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만이 사는 대도시에서 마냥 옛날처럼 부대끼면서 살아가게 되면 사고는 필연적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복잡해지면, 질서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진행신호가 끝났는데도 무리해서 진입하거나, 차로를 바꿀 때 굳이 다른 차 앞으로 끼어들다 보면 교통사고를 피할 수 없다.
    남들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살다보면, 더 큰 피해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서로 잘 알고 이해하는 친구나 이웃 사이에는 얼마든지 서로 양해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친구처럼 이해를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저 사람도 내 이웃처럼 날 이해해 주겠지 하다가 큰일을 당하게 되면, 질서를 위반한 내 잘못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처럼 양보하지 않은 그 사람의 잘못인가.
    또한 불가피하게 남에게 폐를 끼쳤다면 상대방에게 반드시 사과하거나, 그 사람이 이해해 준 것에 대해 감사표시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감사해야 할 상황에서 감사할 줄 모르고, 미안하다고 할 곳에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 안 된 것이다. 인간의 기본을 다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 시민의 자격이 없다.(2010. 07. 22자 대구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