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 변경

    요즘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방학 첫날이면 꼭 하던 것 중의 하나가 계획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큰 종이에다가 접시를 엎어놓고 큰 원을 그려서 거기다 요즘 말로 하면 피자 모양으로 칸을 나누고, 잠자는 시간부터 밥 먹고 공부하고 노는 시간까지 24시간의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지나치게 빡빡하게 세워져서 그런지, 아니면 방학이라 마음이 해이해져서 그런지 며칠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기 일쑤였지만, 아이들 방에는 어김없이 붙어 있었고, 방학이 끝나면 제출하는 일기장과 더불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게 하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때의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꼭 계획표를 만들게 하셨는지, 그게 유행이었는지 아니면 제자들에게 계획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오늘은 계획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어서 선생님들께 죄스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실 우리네 생활이야 뻔한 것이어서 계획을 세우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분도 많지만, 그래도 계획이라는 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매달 돌아오는 수지계산도 마구잡이로 할 수 없을뿐더러, 가족의 생일이며 조상의 기일(忌日)도 미리 챙겨야 하고, 아이들이 있다면 학교 일정에 따라 뒷바라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곤란한 일을 겪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사업을 한다거나 아니면 그해에 색다른 일을 벌일 때에는 반드시 계획이 필요하고, 이때 미리부터 면밀한 조사를 거쳐 빈틈없는 계획을 세웠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전에 해본 일이라도 다시 점검하고 새로운 경향과 환경을 반영하여 계획을 다시 세운다면 전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계획을 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계획을 세우는 것도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예로 들어보자면, 자신의 일생을 아우르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와 실행기 그리고 목표달성 후의 향유기 등으로 구분하여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일생을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눈다면, 유년기에는 신체와 정신의 기초를 닦고, 소년기에는 보편적인 생활을 위한 학업과 기술을 연마하고, 청년기에는 높은 수준의 전문적 교육을 통하여 풍부한 인생을 준비하며, 장년기에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과 사회에 봉사하고, 노년기에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체적인 차원의 계획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매년마다 한 해의 계획, 한 달의 계획, 하루의 계획들이 빠짐없이 수립되고 실행되어야만 이 사람의 일생이 정말 알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고장이나 나라의 경우에는 이런 요청이 더욱 절실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계속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고장이나 나라에 그런 계획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몇 년 후까지 계속되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고, 연초면 연간계획이 그리고 매월 초면 그달의 계획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 보고 있으면 큰 계획에 따라 작은 계획들이 수립되어 시행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길을 하나 내고 건물을 짓도록 건축허가를 하나 내주더라도 큰 계획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인데, 단체장이 바뀌고 집권당이 달라지면 어제까지 시행되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예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추후 외적인 환경과 내적인 형편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계획의 변경은 신중하여야 한다. 과학자를 인생의 목표로 했다가 도중에 군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그때까지 노력한 것이 허사로 될 뿐 아니라 새로운 목표에 대해서는 이제 출발선상에 놓인 것이니 남들보다 늦게 되고 만다. 세류에 휩쓸려 조삼모사(朝三暮四)하기보다는 계획을 바꿀 필요와 바꾸었을 때의 비용을 잘 살펴 결정해야 뒤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또다시 계획을 바꾸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2010. 02. 18자 대구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