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존중하고, 사람을 존중한 연후에

    얼마 전부터 개헌 얘기가 모락모락 김나듯이 피어오르더니, 일전의 보도에 따르면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라는 곳에서 연구보고서를 내놓았다고 한다. 그 내용 중에는 이원정부제, 대통령의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국회 양원제 등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헌법 전공자는 아니더라도 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새로울 것은 없는 제도들이지만, 나름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안보나 경제발전을 빌미로 해서 대통령제를 채택한 이래 그로 인한 혜택도 많이 받았지만 또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통령 1인의 의사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현실은 실용성은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에서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 제도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헌법에 도입하여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켜놓은 결과, 모든 국정이 대통령에서 시작하여 대통령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대통령의 업적이 되면서, 반대로 조금이라도 잘 못되면 그것을 대통령의 책임으로 돌리게 되고, 이러한 것을 둘러싸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은 험악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대통령의 출신지역이나 보수와 진보 같은 이념적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모든 분란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야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대통령제를 취하는 많은 나라들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켜 민주정부에 어울리는 통치제도를 만들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앞에 얘기한 보고서도 대략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그동안 적지 않게 헌법을 고쳐온 나라이다. 1948년 건국 이래, 9차례에 걸쳐 개헌이 이루어졌는데, 그때마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거쳐 헌법을 고쳤다. 4·19와 같이 민중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집권자의 의사를 반영해서 개헌이 이루어진 것이 보통이다 보니, 국가의 최고규범인 헌법에 대한 존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기능을 하고 있어서 뉴스에라도 헌법 얘기가 가끔 나오지, 그렇지 않다면 헌법이 어떻게 법 위의 법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 헌법은 장식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헌법을 언제 어떻게 고칠 것인지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헌법을 포함해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합의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국민의 의사가 무엇인지 사전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속한 정파나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헌법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현행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정신을 우리가 진정으로 잘 지켜왔는지가 먼저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현행 헌법의 사상을 우리가 지키지도 않으면서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고 고치려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새 헌법을 잘 만들어도 나라가 잘 운영되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니라,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할 것이므로,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떠한 법을 만들어도 결국은 마찬가지 상황으로 되고 만다.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대통령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가들에게는 독재의 수단으로 되어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 의하는 것이다. 법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존중하는 풍토에서는 법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지만, 법의 허점을 파헤치고 어떻게 하면 법망을 피해나갈까 궁리하는 곳에서는 법이란 마지못해 갖추어 두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법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법을 존중하고, 법이 보호하려고 하는 인간을 존중하는 풍토가 먼저 조성되지 않으면 개헌논의는 아무리 해도 의미가 없다.(2009. 9. 3자 대구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