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기를 살리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릇없는 손자 손녀를 무조건 두둔하는 할머니들이 꽤 있었다. 식당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워도, 그릇을 엎거나 심지어 컵을 깨뜨려도 막무가내 역성을 드는 할머니들은 손자가 기 죽을까봐 나무라면 안 된다고들 하셨다. 그 바람에 버릇이 나쁜 아이들이 모처럼 외식 나온 다른 가족들 분위기를 망치기가 일쑤였지만, 요즘은 그런 모습이 많이 줄었다.
    할머니들이 이렇게 남의 눈총을 무릅쓰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기(氣)” 살리기는 손자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달라는 염원을 내포하고 있다. 워낙 오랜 세월 굴곡이 많았던 시대에 얼마나 기가 죽어서 살아왔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오히려 숙연해진다. 개인에게 있어서 이렇게 기 살리기가 중요하다면 나라의 기 살리기는 이보다 백배, 천배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나라 그 자체의 기 살리기가 아니라,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공무원들의 기 살리기이다.
    우리나라는 국민주권국가이기 때문에,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 공무원은 말하자면 주인을 위해 일하는 머슴이다. 그래서 다른 말로 공무원을 공복(公僕: public slave)이라 한다. 문제는 머슴이 일을 잘하면 주인이 편하고 소득도 많이 얻게 되지만, 종이 게으름을 피우면 주인이 고달파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머슴 장가드는 해에는 농사도 접는다.”라고 했을까. 물론 우리 주변에 있는 공무원을 보면 창의적이고 부지런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분들도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경우를 지적하고 있다. 불편한 사항이 있어서 전화를 했을 때, “사정은 이해 하지만, 규정이 없어서, 예산이 없어서, 처리가 힘들겠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 말을 듣는 나라의 주인은 비참해진다. 분명히 자신이 얘기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도, 그 공무원은 정 불편하면 당신이 직접 알아보거나 손수 뛰어다녀 보라는 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경우에 그들만을 나무랄 수 없다는데 있다. 이른바 솔선수범해서 일을 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공무원 사회에서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은 별난 존재가 되어 있고, 이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까지 주는 실정인데, 쓸데없이 일을 만든다는 것이겠다. 이런 경우에 결과가 조금이라도 잘 못 되면 바로 거 봐라, 잘난 척 하다 잘 됐다는 힐난이 쏟아진다. 자칫하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만 하고 꼼짝 않는 것이 상수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선진국에서는 공무원들에 대해 많은 재량권이 주어진다. 진정한 의미의 공복이라면 주인이 불편함이 없도록 모셔야 한다는 것이고, 규정에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예상하지 못했던 불편이 생긴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라는 의미이다. 제대로 된 나라일수록 공무원의 입에서 규정이 없다는 얘기는 나오지 어렵다. 이런 나라에서는 공무원들이 민원인 앞에서는 차도 마시지 않는다. 일 안 한다는 소리가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많은 재량이 주어져 있으므로 일을 하기가 수월하고,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일하지 않는 공무원은 당연히 퇴출 대상이다. 반면 잘하려다가 의도하지 못한 결과가 나와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책임이 아니라,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격려를 해 준다.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재량권이 과도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 재량은 국민을 위해서만 행사되도록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공무원이 재량권을 남용하거나 오용한 경우, 거짓말로 잘못을 덮으려 한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벌을 받는다. 대부분 이런 경우에는 공직을 떠난다. 재취직도 불가능하고, 민간에서도 취업이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사회에서 매장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무원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강하고, 그러다보니 입법자들도 공무원에게 재량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활동을 규정 안으로 옥죄고, 이를 마음대로 벗어나면 규제하는 분위기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연히 복지부동이 정상적인 공무원활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결국 국민들만 불편하고, 힘들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오히려 공무원들이 힘내서 일하게 하고, 일 잘하는 공무원을 포상하고, 일 안 하는 사람을 퇴출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의 기 살리기는 공무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시급하다.(2009. 8. 6자 대구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