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준비하지 않는 사회

    퇴근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오후 5시 40분경이면 학장실의 전화벨이 어김없이 울린다. 행정실의 직원 선생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학장은 이미 알고 있다. 결재를 해달라는 얘기다. 전자결재 시스템 덕분에 간단한 것은 자기 책상에서 쉽게 결제가 가능하니, 전화로 요청을 하는 것이다. 살펴보면, 여러 가지의 서류들이 있지만, 대개 꼭 빠지지 않는 것은 내일 학회나 회의가 있는 교수들의 출장서류이다. “내일 출장 가는데, 전날 퇴근할 무렵에 결재를 받다니?”하고 의아해 할 사람이 없지 않겠지만, 이런 일은 다반사다. 그래서 부산의 모 대학교 총장은 출장신청은 출발 7일전까지 내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곧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절대 지킬 수 없었던 시한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출발 7일 전이면 학회에서 아직 정식 통지도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까지 출장신청을 하지 않으면 결제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출장을 가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는 반발이 비등했다.
    학회의 총무를 맡고 있는 교수는 통지를 일찍 보내기 싫어서 임박해서 보낼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해도, 끝까지 발표자며 토론자가 정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막판에 가서 꼭 내용을 바꿔달라고 하는 분이 있다. 그러다보니, 취임 초기에는 미리미리 보내다가, 가욋일을 피하기 위해 정말 도저히 어쩔 수 없게 된 정도로 임박해서 통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 것을 감안해서 하다보면 학회 전날까지도 준비가 덜 끝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준비가 다 되지 않은 경우에는 꼭 무슨 탈이 나고 만다. 장소를 잘못 알고 발표자가 엉뚱한 곳에 가버린다거나, 회의장 난방장치가 고장 나 종일 덜덜 떨며 얘기를 하게하고, 심지어는 학회 후 저녁식사 자리가 잘못되어 황급히 다른 곳을 물색하는 일도 일어난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학회는 피차간에 잘 아는 처지라, 대부분 양해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집단이나 나랏일쯤 되면 준비부족은 큰 문제가 되고 만다. 그래서 큰일을 하는 사람들을 뽑을 때는 더욱 많이 살피는 것이며, 작은 규모의 일에 비해 할 일도 많고 부담도 크기 때문에 대부분 대우도 더 좋다. 그래서 모두들 이런 일은 서로 하고 싶어 하고, 그런 자리에 앉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도 마다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소위 학력성취도 평가 파문도 궁극적인 준비부족에서 나온 사태라는 생각이 든다. 담당자가 보면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매스컴은 이미 채점과 입력, 보고, 통계의 작성 등 일련의 과정에서 허점이 있음을 누차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것은 결국 좀 더 많이 고민하고 좀 더 다각도로 검토하여 철저하게 준비하였더라면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라는 점에서 볼 때, 다급하게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준비가 불충분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스쿨 문제도 마찬가지다. 처음 로스쿨 얘기가 나온 것이 20년이 다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2007년 여름에 소위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운영에 관한 법률’(로스쿨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에는 변호사를 한 해에 몇 명을 뽑을 것인지, 시험과목은 어떻게 할 것인지 전혀 합의나 계획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아무 대책 없이 덜컥 법학전문대학원만 전국에 25곳이나 인가해놓고, 이제 와서 변호사시험 과목은 이러네, 몇 년에 몇 번밖에 응시하지 못하네, 예비시험은 보네 안보네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1년에 변호사를 몇 명 뽑을지 아직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이제 며칠 후면 신입생이 들어오고, 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교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혹자는 학교에서는 시험에 상관없이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전원이 변호사를 지망하는 학생들로 되어 있는 강의실에서 시험은 알아서 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다. 굳이 선발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법률가 양성이라는 취지를 살리려고 했다면 그에 합당한 시스템을 갖추어놓고 학생을 뽑도록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 지나칠까.
    아직도 책상 위에는 작년 가을에 있었던 외국 학회의 초청장이 놓여있다. 로스쿨 일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사무국에서는 학회 반년 전에 이 초청장을 보내주었다.(2009. 2. 26자 대구일보)